물속이라는 자리, 참 상큼한 공동체이다
따사로운 햇살 등에 업고 제 그림자 쫓아가는 피라미 떼의 하얀 배때기,
고요한 숨결까지 훤히 드러내 보이는 바닥에는
모래알 구르는 소리,
물풀들 하얀 종아리가 저희끼리 살 부비며 수런거릴 때
낭창낭창 엿듣는 물잠자리 몸짓까지.
푸른 하늘을 품고 사는
한낮의 물빛은
참 상큼한 낯빛이다, 물방개 같은 내가 닿을 수 없는 맨 얼굴이다
짧고도 긴 이야기 / 최해춘
무덤 한 채 짓는 시간을 가늠해 보기로 하였다
잔디의 실핏줄이
메마른 산 흙에 뿌리 내리고 곁에서
땅속 말을 전해줄 나무들
꽃 피워 올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 보기로 했다
땅 속으로 스며드는 구름 그림자
흙의 가슴 어루만질 때
동그랗게 굴러 온 바람의 웅얼거림은 모두
봉분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
따스한 볕 한 줌은 그늘을 피해 하늘이 잘 보이는 자리마다
멍석을 펴고 있다
이제
봉분 하나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
무덤과 나의 거리를 내 그림자가 심각하게 재고 있다
선 채로 재는 거리에는
손이 닿지 않는데
누워서 재는 거리는 무척 가깝다
무덤 한 채 짓는 시간과
무덤에 이르는 거리는 무척 짧고도 긴 이야기 같다
버드나무 숲길의 넙치 떼 / 최해춘
강둑길 따라 버드나무 한가로운 숲길에 들다
이파리 하나마다
강물에 담긴 이야기 한 줄씩 반짝 거린다
물은 땅속 길을 찾아 줄기를 타고 가지를 지나며
샛강의 기억 퇴색시키고
걸음 멈춘 이파리에서 발원의 진심 되새기고 있다
수심 깊은 바다 속 넙치의 허연 뱃가죽에서
강물의 지난한 여정을 읽듯
뒤집어지는 이파리들 춤사위에서
첫걸음 떼던 강물의 하얀 발바닥을 본다
멀리서 걸어 온 자의 가슴엔
언제나 숱한 바람의 상처 남아 있지만
흔들리며 살아온 마음
절정에 이르면 춤사위로 흔들릴 줄도 아는 가 보다
버드나무 줄기가 강물의 마지막 춤사위를 위해
물관을 연다
수심 깊은 바다가 된 버드나무 숲길에
뱃가죽 허연 넙치 떼 와르르 와르르 몰려다닌다
벌레 한 마리 / 최해춘
새벽잠 떨치고 멍하니 앉았는데
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
눈앞에서 꼬물꼬물 열심히 거실을 기어간다
혹시,
아침 자시러 가는 길은 아닐런지
아니면,
밤새 어둠에 길 잃고 헤매다 집 찾아 가시는지
짐짓,
가시는 길 편히 잘 가시라 일러주고
문득 생각해본다
아이쿠, 놀래라
첫새벽 눈 뜨고 처음 보는 것이
사람이라니
새벽부터 죽음의 하루를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
새벽길 가는 벌레의 발걸음이 분주하다
합죽한 입 / 최해춘
길을 입에 물고 걸어가는 할머니 굽은 등을
유모차가 받쳐주고 있다
걸어온 길 아주 먼 듯 유모차바퀴가 헐렁하다
유모차 요람에는
할머니의 합죽한 입이 담겨있다
틀니를 끼우면 바퀴가 더 잘 굴러 가련만
차도와 인도의 경계에서
헐렁한 바퀴가 가로로 누워 갈 길을 거부한다
물고 있던 길 잠시 내려놓고
경계석에 주저앉아 뭉게구름 뱉어내는 할머니
무릎 관절 삐걱거리는 신음소리에
삶의 경계마저 머쓱해질 때
주름진 얼굴에 버섯꽃 하나 고요히 피워 오른다
침침한 눈으로 더듬는 하늘가
붉은 노을길이 꽃길처럼 화사하다
이제 흙 묻은 먼지 길 뱉어버리고 화사한 꽃길 따라
허리 펴고 싶은 할머니
유모차 요람에서 합죽한 입을 꺼낸다
고상돈(2011-01-13 19:40:38)
경주문맥동인지 출간을 축하드립니다. 최시인님!
신묘년 새해, 기쁜일로 가득하신 한 해 되시옵길...
박가월(2011-01-15 20:28:25)
잘 안보이시지만 꾸준히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
경주문맥이 활발히 활동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시기 바랍니다
몇 번째인가 출간을 축하드립니다
세해도 좋은 시 많이 써주시고 건강하십시요...시인님
